
로마 건축은 독자적으로 성립되었다기보다는 다른 민족의 선례를 모아 종합화를 잘 해낸 결과에 가깝다. 그럼에도 로마는 서양건축 역사에서 가장 많은 양의 건축 유산을 남겼다. 내용에서도 서양건축의 바탕을 이룰만한 것들을 많이 남겼다. 그리스 건축과 차이도 커서 같은 고전주의에 속하면서도 그리스 고전주의와 로마 고전주의를 따로 구별해서 부른다. 적어도 서기 10세기 경까지 유럽 건축은 여전히 로마 건축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문명까지 포함한 양식사조로 보면 서양에는 현대에도 로마 건축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가져오는 건축가들이 일정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배경 아래 로마 건축의 뿌리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 건축의 영향이다. 그리스는 이미 기원전 800년경부터 이탈리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본토에 그리스 문명이 모습을 드러낸 초기로 로마 건축이 그리스 건축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욱 명확한 영향은 기원전 2세기에 있었던 ‘헬레니즘 현상’이다. 기원전 146년에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합병하면서 동방의 발달한 헬레니즘 고전주의 문화를 자신들의 영토로 직접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로마만의 건축전통으로, 구조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가 주를 이룬다. 이때 기술은 일차적으로 첨단기술을 의미했지만 반드시 첨단기술일 필요는 없었다. 기술을 대단위로 운용하면서 전쟁이 집중시킬 수 있는 합목적적 합리성과 조직력도 중요한 요소였다. 로마는 이 두 가지 기술을 모두 갖췄는데 그 중심에 건축과 농업이 있었다. 로마의 군사기술은 상당부분 건축술과 농업기술을 활용한 것이었는데 특히 건축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탈리아 반도의 최초 문명 - 에트루스칸 건축
 이상이 로마건축을 탄생시킨 두 뿌리였는데, 먼저 등장한 것은 구조기술과 실용주의였다. 이런 종류의 건축은 정식 양식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 탄생 연도를 정확히 집어내기가 힘든데, 에트루스칸 건축을 출발점으로 잡을 수 있다. 에트루리아인은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문명을 일군 민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900년경부터 등장했으며 753년 로마가 건국하고 509년에 공화정 기가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로마 역사로 보면 왕정기에 해당된다. 에트루스칸 건축은 크게 무덤, 신전, 성벽 등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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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타키아 묘역 내 돋을새김 무덤 - 에트루스칸 문명의 무덤건축은 그 자체로 중요성을 갖는 동시에 당시 묘실 내부를 주택 실내로 꾸며서 당시 생활상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무덤에는 봉분형, 격자형, 암묘형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봉분형이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체르베테리의 반디타시아 묘역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무덤에서는 실내 천장에 볼트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으며 실내 전체를 주택과 유사하게 꾸며서 당시 생활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주택 실내를 모방한 것은 의도적이어서 타블리노의 무덤은 평면부터 주택을 본떠 만들었다. 이는 사후 세계를 믿었던 에트루리아인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신전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처음에 목구조로 짓다가 점차 석구조로 바뀌었으며 그리스 신전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네 면 가운데 정면에만 계단을 두고 나머지 세 면은 기단으로 막았다. 정면성이 처음 나타난 것이다. 셀라는 종 방향으로 길게 셋으로 나누었으며 열주는 정면에 세 열과 양 측면에 각 한 열씩 두는 것이 표준형이었다. 약식도 있어서 셀라는 작은 방 하나만으로 구성되고 열주는 정면에 두 열만 세웠다. 대부분의 에트루스칸 신전은 담으로 영역을 구획해서 자연 속에 사면을 개방하며 서 있던 그리스 신전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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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루비우스의 설명에 따라 건축가 젬퍼가 추측해서 그린 에트루스칸 신전(1878)
비례법칙이 없는 대신 높은 기단 위에 올려져 정면성을 강화했다.
성벽은 에트루스칸 건축의 정수로 같은 시기 그리스 반도의 성벽이 막쌓기에 가까운 데 반해 에트루스칸 성벽은 잘 다듬은 사각형을 주요 재료로 사용한 완자쌓기로 축조했다. 이는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에 남겨준 주요 유산으로 로마인들은 이것을 이어받아 자신들만의 튼튼한 조적술로 발전시켰다. 현재 에트루스칸 시대의 성벽은 남아있는 것이 없는데 페루자의 도시성벽이 시기는 기원전 2세기로 한참 후이지만 축조술은 에트루스칸 때의 기술이 남아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공화정기 건축 – 로마 신전의 탄생
 로마 공화정은 에트루스칸 출신 왕이 지배하던 왕정을 종식시키며 시작되었다.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끝내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건축을 남기지 못했다. 공화정만의 건축이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때 헬레니즘 현상을 겪으면서부터였다. 그리스 고전주의를 수입한 신전이 등장했다. 그리스 신전보다 규모도 작아지고 섬세한 부재구성이나 비례와 조화 등의 균형미는 사라졌지만 완벽한 디테일을 자랑하는 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 오더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등장하는 변화가 있었다. 그리스 신전을 완전히 복사한 것은 아니어서 정면성과 열주 구성 등에서 에트루스칸 신전의 양향이 흘러들면서 둘을 합한 로마 신전이 탄생했다.
로마 신전의 갑작스러운 탄생을 보여주는 최초의 예로 로마 시내에 등장한 아레아 사크라 디 라고 아르젠티나(아르젠티나 호수의 성역이란 뜻)라는 신전단지를 들 수 있다. 판테온 가는 길목인 로마 시내 한복판에 있는 단지인데 세 기의 신전으로 구성된다. 농업의 여신 포르투나 신전을 비롯해서 주투르나 신전과 페로니아 신전인데 기원전 3세기 초~2세기 사이에 지어졌다. 그리스 건축가 헤르모도루스는 기원전 2세기 중반에 로마에 초청되어 와서 주피터 신전과 주노 신전 두 기를 설계해서 지었다. 이외에도 기원전 2세기말에 포르투나 비릴리스 신전과 헤라클레스 빅토르 신전 등이 지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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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르타 아우구스타나 - 에트루스칸 건축의 발달한 성벽 기술을 보여주는데 이후 로마에 전수되어 구조 실용주의의 바탕을 이룬다.
2 로마 시내에 위치한 포르투나 신전의 모습 <출처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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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의 공화정 말기로 오면 대중정치의 시대가 열리면서 건축 발전을 촉진하게 된다. 행정과 군사를 모두 장악한 콘술이라는 최고관직을 뒀는데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고 두 명을 둬서 권력집중을 막았다. 술라-폼페이우스-카이사르의 3인이 대중주의 정치를 이끌었는데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양한 공공건축을 시행하게 된다. 그리스 신전을 모방하거나 토목기술에 머물러 있던 로마건축이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시기로 볼 수 있다. 고급양식인 신전과 오더양식 중심으로 진행되던 그리스 건축과 달리 로마 건축은 현실참여가 대표적인 특징인데 이것이 최초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술라와 카이사르의 대중주의 건축
 술라는 제일 먼저 이런 변화를 이끌었다. 건물들이 대형화되고 기념비적 웅장함을 드러냈는데 이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대중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팔레스트리나의 포르투나 프리미제니아 신전(기원전 80년경)이 대표적인 예로 산꼭대기 같은 높은 기단 위에 큰 운동장을 딸려 지은 신전이었다. 신전은 경사로와 계단을 교대로 오르며 진입하게 했다. 연속공간과 이동의 개념을 건축에 도입한 최초의 예라 할 수 있다. 지구라트와 이집트 신전에도 이런 처리가 일부 나타났지만 이것을 스토리의 연작 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은 이 신전이 처음이었다. 긴 진입로에서는 축제행렬이 벌어지는 등 시민들에게 볼거리와 놀이거리를 제공하면서 대중주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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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 프리미제니아 신전 - 술라 대중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예로 긴 진입과정을 거쳐 절정을 향해 오르는 점증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카이사르는 로마 시내에 최초로 포룸을 닦은 정치 지도자였다. 포룸은 그리스의 아고라를 이어받아 로마시대 대도시 내에 시민들의 종합 생활공간으로 형성된 광장인데 처음에는 자생적으로 등장했다. 대중주의 정치를 펴던 카이사르는 시민들의 도시생활을 돕기 위해 포룸을 개발했는데 자신의 이름을 따서 카이사르의 포룸이라고 명명했다. 로마 시내에는 시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포룸 로마눔과 황제들이 인위적으로 닦은 임페리얼 포룸이 서로 마주보며 도심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카이사르의 포룸은 임페리얼 포룸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성을 갖는다.
카이사르의 포룸 - 카이사르는 시민을 위한 건축을 많이 남겼는데 포룸도 그 중 하나다. 이 포룸은 이후 임페리얼 포룸이 시작되는 출발점 역할을 했다.
카이사르의 포룸은 카이사르 자체에 대한 정치적 평가에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흔히 카이사르를 독재자의 전형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그의 대중주의 때문에 손해를 본 귀족들에 의해 왜곡된 측면도 있다. 일반 시민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폈고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이익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초로 로마 개발계획을 실행한 것이 좋은 예이며 카이사르의 포룸은 이 사업의 일환이었다. 포룸 로마눔 내에 시민들의 실용 생활시설은 바실리카 율리아를 지은 것도 또 다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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