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17, 2011

카롤링거 건축 - 중세의 시작

로마네스크 건축은 중세건축의 본격적인 시작에 해당된다. 중세의 건축 양식은 둘로 나뉘어서 전반부가 로마네스크(900년경~1070년경)이고 후반부가 고딕(1120년~16세기 중반 경)인데, 로마네스크 시작 이전에 중세건축의 징조가 나타난 현상들을 모아서 프레-로마네스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롤링거 건축은 다시 그 중심을 이룬다.


샤를마뉴와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는 프랑크 왕국을 통치했던 왕조의 이름으로 751~843년 동안 지속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북부지방을 통합한 알프스 이북지역의 큰 왕국이었다. 로마를 벗어나 서북유럽에 최초로 독립적 문명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이후 843년 베르댕 조약으로 서프랑크(프랑스), 중프랑크(이탈리아), 동프랑크(독일)로 분할되면서 오늘날 이 세 나라의 국경선이 최초로 등장하게 되며 본격적인 중세로 진입하게 된다.

프레-로마네스크에서 건축사적으로 중요성을 갖는 시기는 샤를마뉴가 통치했던 768~814년이다. 그는 또 한 명의 걸출한 대제로, 프랑크 왕국의 기초를 닦아 서북유럽의 독자적 문명이 탄생하는 길을 열었다. 중세까지 많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건축은 중요한 활동이었다. 이번에는 아헨의 왕궁과 수도원의 두 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왕궁은 세속권력의 중심지로서 정치, 행정, 제도 등을 담당했고 수도원은 종교적 중심지로 문화, 예술, 학문 등을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찾아내어 동원한 건축술은 어쩔 수 없이 로마의 것이었다. 8세기 중반에 가장 발달한 건축술은 비잔틴 것이었지만 비잔틴은 이미 너무 멀고 이질적인 문명이 되어 있었다.

카롤링거 건축은 이처럼 공간 구성 등에서는 초기기독교 건축과 구별되는 분화, 발전을 이루었으나 이것을 짓는 시공기술은 로마의 건축술을 총 집대성해서 부활시켜 사용했다. 로마네스크라는 단어 자체가 ‘로마답다’라는 뜻을 가진 점은 이런 현상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중세 필사본에 묘사된 샤를마뉴와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 <출처 : wikipedia>

아헨 왕궁 예배당과 중앙 집중형 공간의 정리
프레-로마네스크 건축에서는 중앙 집중 형과 선형의 두 교회 양식 모두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는데 아헨 왕궁 예배당은 전자를 대표했다. 새로 발명한 내용은 많지 않지만 산 비탈레 성당의 팔각형 겹 공간과 복층 갤러리 구성을 빌려와서 서북유럽에 맞게 정리함으로써 로마네스크 건축으로 발전해 갈 바탕을 닦은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제일 큰 발전은 수직성이 증가하고 벽체가 두꺼워졌으며 모듈이 등장하는 등의 정리가 있었다는 점이다. 중앙 공간의 지름 대 높이의 수직 비율이 산 비탈레의 1.78에서 이곳에서는 2.1로 커졌다.

아헨 왕궁 예배당(Palatine Chapel at Aachen). 독일. 790년~805년- 수직성, 석재 벽체의 물성, 석조 8각형 돔 천장 등을 보여준다.
아헨 왕궁 예배당(Palatine Chapel at Aachen). 독일. 790년~805년. 갤러리 층의 석조 볼트 천장인데 이는 중세 성당의 표준축조 기법으로 이어진다.


이는 게르만족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조형적으로 볼 때 지중해의 고전주의를 수평선에, 게르만 정신을 수직선에 각각 대응시키는 것이 통례인데 이것이 반영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갤러리의 층수가 2층에서 3층으로 증가했으며 이를 구조적으로 안전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벽체, 아치의 아키볼트와 피어, 기둥 등 모든 내력구조가 두꺼워졌다. 산 비탈레의 벽체 두께가 평균 0.8~1미터였던 데 반해 이곳에서는 1.3~2미터로 두 배 가까이 두꺼워졌다. 중세건축이 고전주의와 대비되어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강한 수직선이라고 볼 때 이미 이곳에서부터 수직으로 치고 오를 준비가 이루어진 셈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석조 볼트로 천장을 덮었다는 점이다. 이는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초기 기독교 건축까지는 목조 평천장이 표준구성이었던 데 반해 중세교회에서는 석조 볼트 천장으로 바뀌는데 이 건물이 그 출발점이 된 것이다. 아헨 왕궁 예배당에서는 수직성 이외에 석조의 육중함이나 물성 등을 표현하려는 종합적 목적 아래 로마 조적기술을 종합화했다. 실제로 샤를마뉴는 이 건물을 짓기 위해 콜로세움으로 대표되는 로마의 원형극장 조적기술을 참고했다. 샤를마뉴는 로마 부흥 운동을 일으키며 개인적으로 콜로세움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는 스스로를 로마제국을 알프스 이북지역으로 옮겨 새로 세운 대제로 정의하고 싶어 했다. 이 건물의 직접적 영향을 보여주는 예로 독일 오트마르스하임의 수도원 교회, 네덜란드 니메헨의 예베당, 벨기에 리에주의 성 요한 등을 들 수 있다.


선형공간의 확장과 강화
중세 시대의 교회양식은 선형공간이 중심이었다. 초기 기독교 건축 때 불완전한 형태로 처음 나타났던 라틴 크로스가 완전히 정착하면서 복잡하게 분화, 발전하게 된다. 이 과정은 길고 복잡한데 그 최종 종착점인 고딕성당의 복잡한 구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 때에는 중세를 향한 선형공간의 첫 번째 분화, 발전이 일어났다. 초기 기독교 건축의 구 성 베드로와 성 밖의 성 바오로를 모델로 삼아 서쪽 출입구, 동쪽 성소, 지하 납골당의 세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커진 서쪽 출입구를 웨스트 워크, 동쪽 성소를 이스트 엔드라 각각 부르며 지하 납골당에는 환상형 겹 공간이 만들어졌다.

  • 1 비트루비우스의 단지(Vitruvian jar) - 성가의 등장과 함께 잔향시간을 늘리기 위해 선형공간이 강화되고 성가대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 2 오트마르스하임의 수도원 교회, 독일, 11세기 <출처 : Eric Gaba at fr.wikipedia>


카롤링거 왕조 때에 기독교 제식의 정비가 일어나면서 교회의 선형성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금육제의 날에 한쪽 교회에서 스테이션 교회(예수의 수난을 나타내는 십자가 행로의 14처에 위치한 교회)로 이동하는 행렬의식이 시행되었는데 이것이 발전해서 매일 행렬의식이 거행되는 쪽으로 자리 잡았다. 성가의 도입도 중요한 요소였다. 성가는 종교적 효과를 위해서 잔향시간이 길어야 했는데 이것을 위해 교회공간의 수직성과 선형성이 증대되었다. 그레고리오 찬트가 대표적인 예인데 카롤링거 왕조 때 로마와 갈리아의 단선율 전례 성가를 채보, 통합해서 만든 것이다.

선형공간의 본격적인 확장은 동서 양끝에서 일어났다. 웨스트 워크를 탄생시킨 배경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순수한 기능적 차원으로 교회가 커지면서 예배당, 부속실, 전실, 통로, 탑, 종루 등 새로운 공간이 증가하게 되는데 이런 시설들이 들어갈 장소로 출입구 위쪽이 제일 적합했다. 다른 하나는 왕실이 개입한 결과였다. 알프스 이북 지역에 교회가 지어지면서 현실권력을 담당하던 지역 왕실과의 관계가 중요해졌다. 왕을 비롯해서 왕실가족이나 대형 기부자 등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들어갈 장소 역시 출입구 위쪽이 제일 적합했다. 이런 배경 아래 출입구 영역이 수평, 수직 양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웨스트 워크와 이스트 엔드

장크트비투스 수도원 교회는 카롤링거 왕조 때 웨스트 워크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예이며 그 건축적 구성이 아헨 왕궁 예배당에서 유래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정사각형 단면의 단일 육면체로 구성되는데 내부를 내접형 그릭 크로스 형식으로 9등분 했다. 1층에서는 중앙 공간을 출입구 겸 열주 홀로, 나머지 공간은 전실과 부속실 등으로 사용했다. 2층은 샤를마뉴에게 봉헌된 예배당이었다. 중앙 공간은 사면을 아케이드 복도로 둘렀으며 그 위에 갤러리를 둬서 예배당만으로도 2층이 되었다. 이런 구성은 아헨 왕궁 예배당의 구성을 빌려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 1 장크트비투스 수도원 교회(Abbey Church of Sankt Vitus). 독일. 873-885년 - 초기기독교 건축과 비교해서 확장된 웨스트 워크를 보여준다.
  • 2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독일. 1001~1031년 <출처 : Heinz-Josef Lücking at en.wikipedia>


교세가 확장하고 제식이 정리되는 등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성직자의 공간도 커져갔다. 바실리카 교회의 동쪽 부분은 본래부터 성단소라고 불리면서 성소를 모아 놓은 집합소로 성상 안치소, 제단, 앱스 등이 기본 구성을 이루었다. 프레-로마네스크 때 들어와 이것으로 부족하게 되었다. 성가가 등장하면서 성가대석이 새로 추가된 변화가 제일 컸다. 보통 트랜셉트 동쪽 부분을 늘어트려 집어넣었는데 그 면적이 넓은 편이어서 앱스와 합해서 ‘슈베’라고 부르는 영역이 만들어지는 등 성직자의 공간 전반에 작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앱스의 분화도 중요한 내용이었다. 제일 흔한 현상이 앱스가 하나에서 셋으로 증가된 것이다. 독일 지역에 주로 나타난 특이한 예로 이스트 엔드가 대칭 개념으로 반복된 ‘더블 엔더’를 들 수 있다. 웨스트 워크의 자리에도 이스트 엔드의 세트를 하나 더 넣어서 성직자 공간이 양쪽 끝에서 나란히 마주보며 두 개 있는 구성이다. 이는 교회의 봉헌대상인 표제 성인이 두 명이어서 성소가 두 곳에 필요할 경우에 등장한 구성이다. 프레-로마네스크 때 처음 등장한 이후 독일의 로마네스크 때 많이 사용되는데 아우크스부르크 성당,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쾰른의 성 제오르지오 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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