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스탄티누스가 완성한 교회건축은 그의 사후에 기독교가 전도되는 경로를 따라 빠르게 전파되어 갔다. 종교가 전파될 때에는 그 제식에 적합한 건축양식도 함께 가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울기 시작하던 로마를 콘스탄티누스가 잠시 부흥시키는 듯 했으나 이미 그는 기독교로 너무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의 사후에 로마는 본격적인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기독교였다. 로마와 기독교의 관계는 묘한 양면성이 있었다. 로마에게 탄압을 받으면서도 기독교는 로마 사회에 파고들어 깊이 뿌리 박았으며 결국은 로마가 기울어가자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부터 서유럽이 본격적인 침체기에 들어가는 7세기까지의 초기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누스 교회가 여러 지역으로 전파, 수출되는 전파기(혹은 확장기)에 해당된다. 그 방향은 에게해 연안, 동방내륙, 라틴 웨스트의 세 갈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에게해 연안의 초기 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가 형성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며 지역의 전통건축과 합해져서 비잔틴 건축으로 이어진다. 동방내륙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고원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지역을 이르는데 이 지역의 초기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누스 때 홀리 랜드에 지어졌던 교회건축을 바탕으로 지역 전통과 에게해 연안의 기독교 건축을 합한 특징을 보였다.
4세기 밀라노의 기독교 건축 
라틴 웨스트는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아드리아 해안과 달마티아, 서쪽의 남프랑스와 스페인, 남쪽의 북아프리카 연안 등을 이른다. 이탈리아 반도가 단연 중심지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밀라노와 라벤나가 특히 중요했다. 4세기는 밀라노가 중심지였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로마가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들자 그 자리를 밀라노가 대신했다. 353년 이후 황제들은 밀라노에 자주 머물렀고 374년에는 성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되는 등 밀라노는 정치와 기독교 양면에서 4세기의 중심지였다. 4세기 후반 밀라노에는 성 나자로, 성 심플리치아노, 성 조반니 인 콘차, 성 테클라, 성 라우렌시오의 다섯 채의 교회가 세워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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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 라우렌시오(St. Lorenzo). 밀라노(Milano), 이탈리아. 370년경 - 초대교회의 중앙집중형 교회를 대표하는 건물로, 4세기 밀라노의 자유로운 기독교 기풍을 반영한다.
- 2 성 라우렌시오(St. Lorenzo). 밀라노(Milano)의 전경 <출처 : Warburg at hu.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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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교회는 다양한 평면구성과 튼실한 시공 상태를 보여주면서 당시 밀라노의 기독교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며 활성화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바실리카 교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중앙 집중 형 평면을 실험했으며 바실리카 교회를 사용할 경우에도 여러 방향으로 변형, 응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는 성 라우렌시오이다. 17~18세기 때 바로크 양식으로 증축되었지만 초기 기독교 건축의 기본 구성이 잘 남아있다. 지름 33여 미터의 사엽형(四葉形)을 기본 윤곽으로 삼아 중심공간과 복도를 분리시킨 반지형 공간으로 구성된다. 성 코스탄차를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완전한 원이 아닌 사엽형을 사용하고 네 귀퉁이를 부분 사각형으로 돌출시키는 등 변형을 가했다. 사엽형 중심공간은 높이가 41여 미터에 이르러 지름에 비해 우물 속처럼 깊은 수직공간을 이룬다.
5세기와 고전 부활 
4세기 말에 로마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4세기 때 침체가 정치적 침체였는데 기독교가 융성하면서 이것을 대체하며 활기를 되찾아 온 것이다. 로마는 기독교 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4세기 말에 전조 현상이 나타나 5세기 때 기독교 도시로의 변신이 일단락된다. 5세기 동안 로마 시내에는 초기기독교 교회들이 여러 채 지어지면서 콘스탄티누스 교회와 합해져 초대교회의 골격을 완성한다. 기독교 양식 내부에 국한시켜보면 바실리카 교회의 표준유형이 부활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에 첫 번째 기독교 전파가 일어나면서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지만 5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보수화된다. 기독교가 자리 잡은데 따른 결과였다.
5세기 고전 부활에서는 트랜셉트.(transept, 십자형 교회당에서 본당과 부속 건물을 연결하여 주는 공간)조차 없는 3랑식 표준 바실리카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380년경에 시작해서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을 이끈 것은 교황들이었다. 이 기간은 로마 교회건축사에서 17~18세기 바로크 시대 다음 가는 전성기였다. 성 밖의 성 바오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라테란 세례당, 성 스테파노 로톤도 등의 주요 교회 네 채가 지어졌고 그 이외에도 성 클레멘테, 성 사비나, 성 시스토 베키오 등 십 여 채의 교구교회들이 지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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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의 성 바오로(St. Paul's fuori le mura). 로마. 380년 - 구 성 베드로와 함께 로마의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며 5세기 로마 기독교건축의 보수주의의 문을 연 건물이다.
5세기 로마의 기독교 건축 시리키우스는 384년 교황 취임과 동시에 성 밖의 성 바오로 증축 공사를 시작해서 400년경 완공했다. 콘스탄티누스 때 첫 번째 교회를 지었으나 사도 바오로의 권위에 크게 미흡하다고 판단해서 그에 걸맞게 증축한 것이다. 구 성 베드로와 짝을 이룰 목적에서 이를 모델로 삼아 5랑식 바실리카 교회로 지었다. 안마당과 전실을 뒀으며 트랜셉트와 앱스가 합해져 성소를 형성했다. 트랜셉트는 두 겹으로 두께는 두꺼웠으나 깊이가 아주 얕아서 돌출된 정도는 약했다. 두 트랜셉트 사이는 한 번 구획 되었다. 아래쪽 트랜셉트의 크로싱 부분 지하에는 바오로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 제단을 배치했다. 전체 크기는 97미터 x 72미터였다. 이 교회는 구 성 베드로와 짝을 이루며 로마의 초기기독교 건축을 대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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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비나(St. Sabina). 로마. 422~432년 - 5세기 로마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건물로 트랜셉트 없는 일랑식 바실리카 원형을 부활시킨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성 사비나는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 때인 422~430년에 지어진 것인데 5세기 원리주의를 잘 보여준다. 앞의 두 교회보다 훨씬 정리된 바실리카 교회 원형을 준수했다. 안마당, 전실, 트랜셉트 등이 모두 사라진 3랑식 육면체 공간만으로 이루어졌다. 성소를 별도의 영역으로 처리하던 구획도 사라졌는데 이는 기독교가 교조화, 세력화되기 이전의 초기 정신, 즉 역사적 예수가 던진 기본정신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을 뜻한다. 네이브의 폭은 좁아졌고 길이는 길어졌으며 높이는 높아졌다. 오더의 간격도 촘촘해지면서 폐쇄적 짜임새가 느껴진다. 그만큼 선형구성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제식을 중시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제단을 향한 종교적 집중을 높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직자 영역이 넓어지면서 기독교가 권력화된 현상을 반영하던 데에서 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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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로마. 432년 <출처 : Kit36a at hu.wikipedia>
식스투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압력을 이겨내고 서방 가톨릭을 지킨 장본인인데 교회 축조는 이런 노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와 라테란 세례당을 확장했고 루치나의 성 라우렌시오를 새로 지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는 고전 부활의 절정을 보여준다. 시작부터 로마 시대 바실리카를 개조했기 때문에 바실리카 교회의 기본 구성이 잘 지켜졌다. 이 위에 규모를 확장하고 화려한 장식을 더하는 방식으로 증축했다. 안마당과 트랜셉트가 없는 단순 3랑식이다. 동쪽 끝부분은 별도의 영역으로 구획해서 성소를 형성했다.
5~6세기 라벤나 - 보수주의의 마지막 꽃 
라벤나는 5세기 보수주의가 마지막으로 꽃핀 곳이었다. 라벤나는 지금도 질과 양 모두에서 로마 다음으로 초기기독교 건축의 건물이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이다. 5세기 중반까지는 밀라노, 에게 해, 로마 등 여러 지역에서 영향을 받아 비교적 자유로운 기독교 건물이 지어졌다. 성 크로체, 갈라 플라치디아의 원형무덤, 동방 정교회세례당, 성 조반니 에반젤리스트 등이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원형무덤과 동방정교회 세례당은 중앙 집중 형 건물로 주로 동방의 영향을 받았으며 여기에 4세기 밀라노에서 있었던 실험의 영향이 더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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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정교회 세례당(Orthodox Baptistery). 라벤나(Ravenna), 이탈리아. 400~450년 - 5세기 라벤나는 아직 4세기 밀라노의 영향아래 중앙집중형 교회가 유행하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유지된다. |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S. Apollinare Nuovo). 라벤나(Ravenna), 이탈리아. 490년 - 6세기 라벤나는 로마의 영향 아래 보수주의로 회귀하는데 성 사비나를 받아들여 바실리카 원형이 다시 등장했다. |
5세기 중반 이후에는 로마의 보수주의가 밀려들어 바실리카 원형이 부활했다. 성 스피리토,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라벤나의 초대 주교인 성 아폴리나레에게 봉헌된 두 채의 교회는 쌍둥이로 보일 정도로 닮았는데 모두 성 사비나의 평면이 전파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트랜셉트 없는 3랑식 육면체로 구성되며 동쪽 끝에 대향 앱스를 뒀고 네이브와 아일은 아케이드로 구획했다. 여기에 동방의 영향이 함께 섞여 나타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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