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March 17, 2011

초기 기독교 건축 - 초대교회 양식

초기 기독교 건축은 말 그대로 기독교가 로마사회에 자리잡아가는 초기 과정에 나타난 기독교 건축양식을 일컫는다. 교회사에서는 초대 교회에 해당된다. 기독교 역사는 오래되지만 구약시대 수 천 년은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사도들에 의해 전도가 본격화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한 유럽과 소아시아 등 로마 제국 내 여러 곳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바오로의 전도가 눈부셨고 베드로는 초대 교황으로서 로마에서 기독교를 조직화하는 업적을 남겼다.


초기 기독교 건축의 성립

초대 교회의 시기에 대해서는 통일된 의견이 없지만 중세교회 이전까지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예수-바오로-베드로’부터 카롤링거 왕조에 의한 프랑크 왕국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 내에서도 세분화된 구분이 필요한데 서기 3세기까지의 탄압기, 4세기의 승리기, 5~6세기의 전파기(혹은 확장기), 7~8세기의 침체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초기 기독교 건축은 이 가운데 건축 활동이 미미했던 침체기를 제외하고 3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로마를 필두로 라틴 웨스트, 에게 해 연안과 소아시아, 동방내륙과 아라비아 반도 등에 지어진 기독교 건축을 통칭한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라는 새로운 문명에 요구되는 건축양식의 기초가 잡혔다. 이를 바탕으로 중세 때 기독교 건축이 융성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건축은 제1 기독교 건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라-에우로푸스의 가정 교회(House-Church at Dura-Europus) - 시리아. 250년경.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초대교회의 가정 교회 모습이다.


초대 교회의 세부적 시기 구분은 초기 기독교 건축의 시기 구분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초대 교회의 탄압기는 초기기독교 건축의 형성기에, 승리기는 콘스탄티누스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완성기에, 전파기는 확산기에 각각 대응시킬 수 있다. 기독교 건축이라고 부를만한 건축물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현재 남아있는 유구를 기준으로 할 때 2~3세기이며 건물 종류로는 가정교회와 카타콤(확장하면 지하 매장시설)이다. 이 시기는 탄압기와 형성기에 해당된다. 4세기의 승리기와 완성기 때에는 바실리카와 무덤교회라는 첫 번째 교회양식 짝이 탄생했다. 확산기 때에는 앞 시기에 완성된 양식이 유럽과 동방 일대로 전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표준양식이 반복되기도 했고 지역 특성에 맞게 변형되기도 했다.


가정교회와 카타콤
가정교회와 카타콤은 시기적으로 형성기를 구성하는 짝일 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기독교 건축의 두 축을 구성하는 짝이다. 기독교 건축은 집회와 매장을 주요한 두 기능으로 갖는다. 집회는 당연히 미사이다. 매장은 우리나라 기독교 건축에서는 낯선 개념일 수 있는데 서양 가톨릭 교회는 주요 성인들의 무덤을 겸하기 때문에 매장 역시 교회에 요구되는 중요한 기능이다.

중세건축으로 넘어 가면서 매장기능은 방사형 채플과 지하 납골당 등으로 정리되면서 교회 건축을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는데 초기 기독교 건축에서는 이것의 전 단계로서 매장기능이 건축형식으로 구체화되는 형성과정이 있었다. 형성기 때에는 이런 두 기능에 해당되는 기초적 건축형식이 형성되었다. 가정교회는 집회 기능을, 카타콤은 매장 기능을 각각 담당했다.

가정교회는 말 그대로 로마의 주택을 교회로 개조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정교회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예로 도무스를 개조해서 지은 두라-에우로푸스의 가정교회(250년경)를 들 수 있다. 도무스의 건축구성은 다행히 기독교의 집회기능에 대응될 소지가 컸다. 중정은 교회의 안마당에, 중심 방은 예배실에, 중심 방의 오른쪽 위쪽 방은 세례실에, 왼쪽 위쪽 방은 예비신도를 위한 학업실 등에 각각 대응되었다. 부엌은 식당에 대응되었다. 세례실에는 벽감과 벽화 등의 장식을 가했다. 벽화에는 가장 오래된 예수상을 비롯해서 성경내용과 예수의 행적 등이 그려져 있다. 예배실은 5미터 x 13미터로 50~60명을 수용했다. 이런 구성은 나중에 바실리카 교회가 등장하면서 일직선으로 펴지기는 하지만 교회의 집회기능을 최초로 건축구성으로 구체화한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교황들의 묘실(Crypt of the Popes) - 로마의 비아 아피아 안티카(Via Appia Antic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의 카타콤(Catacomb of St. Callistus)의 한 장면인데 주요 성인이나 순교자, 그리고 교황의 무덤은 별도의 묘실에 치장을 했다.


기독교는 부활과 사후 구원을 믿기 때문에 화장보다 매장을 장려했다. 초창기 기독교는 성인이나 순교자처럼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에서 일반 신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매장을 담당하는 역할을 겸했다. 그 방향은 둘로 구별할 수 있다. 하나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대상인 경우로 단순한 매장을 넘어서서 건축적으로 특화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다수의 평신도를 위한 단순한 매장으로 이는 당시 로마의 공동묘지를 사용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공동묘지에 묻히되 기독교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매장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평신도들의 묘지 사이에 공간을 넓히고 특별한 건축 처리를 가하는 등 중요한 인물의 묘지를 특화 처리했다.

성 세바스찬 카타콤 내부 <출처 : FlickreviewR at it.wikipedia>
성 칼리스토 카타콤 내부의 선한 목자 프레스코화 <출처 : wikipedia>


이 두 시설을 합해서 카타콤이라 부른다. 형성기 때 매장시설은 로마의 공동묘지를 사용했는데, 당시 로마의 공동묘지는 지하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로마시내에는 묘지를 지을 수 없어서 성 밖에 위치하는데 비아 아르데아티나, 바이 아피아, 비아 라티나 등의 거리에 몰려 있다. 이 거리에는 성 세바스찬의 카타콤, 도미틸라의 카타콤, 성 칼리스투스의 카타콤 등 대표적인 카타콤이 위치한다. 건축적 구성은 중앙통로와 묘실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중앙통로는 주로 일반 신도를 위한 곳으로 양옆의 벽면에 벽감을 파서 석관이나 옹관을 뒀다. 묘실은 쿠비쿨룸이라는 별도의 명칭이나 히포게움이라는 일반적 명칭 등으로 불렸다. 묘실은 재력가, 순교자, 성인 등을 위한 별도의 매장공간이었다. 형태는 사각형을 기본으로 육각형, 팔각형, 비정형형태 등 다양한 형태로 지어졌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묘실인 경우 고전주의 파사드로 장식하거나 아치로 벽감을 파는 등 별도의 건축적 처리를 가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기독교 건축의 완성
4세기의 승리기를 이끈 것은 콘스탄티누스(재위 306~337)였다. 311년의 기독교 관용령을 시작으로 312년에는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했고 313년에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했으며 326년에는 동로마의 국교로 선포했다. 정치적 야심이 큰 인물이었는데 여기에 기독교 교회의 수장 자리를 자임하면서 황제의 현실 권력에 기독교를 합해 이후 1500년 서양 역사를 이끌어 갈 거대권력을 탄생시켰다. 막센티우스와의 권력투쟁에서 기독교도의 참여로 결정적 승리를 거둔 점이 좋은 예이다.

  • 1  라테란의 성 요한(St. John in Lateran). 313년경 공사 시작. 콘스탄티누스 바실리카라고도 불리며 바실리카 교회의 시작을 알린 건물이다. 일부 변형이 있긴 했지만 지어지던 당시의 검소한 모습이 남아있다.
  • 2  라테란의 성 요한 교회의 앱스 부분 <출처 : Stefan Bauer at de.wikipedia>


개인의 종교적 열정에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면서 그는 서양 역사상 가장 많은 교회를 건축한 황제가 되었다. 그가 남긴 기독교 건축의 업적은 단순히 양에만 있지 않았다. 바실리카 교회와 무덤 교회라는 기독교 건축의 두 가지 대표 건물 종류를 최초로 완성시킨 점이 더 중요했다.

바실리카는 교회의 집회 기능, 즉 미사를 담당하는 건축양식이다. 원래는 로마 시대 때 시민들의 도시생활을 종합적으로 담당하던 건물 종류였다. 직사각형 공간을 종 방향으로 삼등분해서 중앙 공간과 양옆의 측면 공간으로 나누어 사용 효율을 높였으며 목조 평천장으로 마감해서 검소함을 대표적 특징으로 가졌다. 시민들 사이의 자발적인 소규모 집회에 맞춰 출입구 반대편 끝에 앱스라는 반원형 천장을 가진 무대를 갖추기도 했다. 크기는 80~90미터 x 50~60미터 정도였으며 수 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바실리카 교회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바실리카를 그대로 받아들여 교회 기능에 맞춰 사용한 교회양식이다. 일단 기능 면에서 큰 변형 없이 미사에 적용될 수 있는 측면이 높았다.

구(舊) 성 베드로(Old St. Peter's) - 로마. 319-22년경. 바실리카 교회의 표준형을 보여준다. 현재의 로마 교황청 전신 건물이다.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바실리카 중의 하나인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출처 : wikipdedia>


중앙 공간은 네이브라는 고참 신도석에, 양 측면공간은 아일이라는 신참 신도석에 각각 맞았다. 직사각형 선형공간은 미사에 요구되는 사제단의 행렬 같은 의식에 적합했다. 앱스 일대는 제단을 놓고 성화를 그리는 장소에 적합했다. 이에 따라 교회 안이 네이브와 아일 쪽의 신도 영역과 앱스 쪽의 성직자 영역으로 구획되었다. 네이브 천장은 2층 높이이고 아일 천장은 1층 높이인데 이는 두 영역의 위계를 드러내는 데 적합 했을 뿐더러 천장 높이 차이를 이용해서 천측창을 내어 실내 채광을 도왔다. 크기도 당시 기독교 교세에 적합해서 주요 교회의 미사에 참석하는 최대 신자 수를 수용하는 데 부족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최초의 바실리카 교회는 라테란의 성 요한이었으며 이외에 구 성 베드로, 성 밖의 성 바오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등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바실리카 교회들이 등장했다.

라틴웨스트 기독교 - 기독교의 확장

콘스탄티누스가 완성한 교회건축은 그의 사후에 기독교가 전도되는 경로를 따라 빠르게 전파되어 갔다. 종교가 전파될 때에는 그 제식에 적합한 건축양식도 함께 가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울기 시작하던 로마를 콘스탄티누스가 잠시 부흥시키는 듯 했으나 이미 그는 기독교로 너무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의 사후에 로마는 본격적인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기독교였다. 로마와 기독교의 관계는 묘한 양면성이 있었다. 로마에게 탄압을 받으면서도 기독교는 로마 사회에 파고들어 깊이 뿌리 박았으며 결국은 로마가 기울어가자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부터 서유럽이 본격적인 침체기에 들어가는 7세기까지의 초기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누스 교회가 여러 지역으로 전파, 수출되는 전파기(혹은 확장기)에 해당된다. 그 방향은 에게해 연안, 동방내륙, 라틴 웨스트의 세 갈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에게해 연안의 초기 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가 형성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며 지역의 전통건축과 합해져서 비잔틴 건축으로 이어진다. 동방내륙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고원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지역을 이르는데 이 지역의 초기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누스 때 홀리 랜드에 지어졌던 교회건축을 바탕으로 지역 전통과 에게해 연안의 기독교 건축을 합한 특징을 보였다.


4세기 밀라노의 기독교 건축

라틴 웨스트는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아드리아 해안과 달마티아, 서쪽의 남프랑스와 스페인, 남쪽의 북아프리카 연안 등을 이른다. 이탈리아 반도가 단연 중심지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밀라노와 라벤나가 특히 중요했다. 4세기는 밀라노가 중심지였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로마가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들자 그 자리를 밀라노가 대신했다. 353년 이후 황제들은 밀라노에 자주 머물렀고 374년에는 성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되는 등 밀라노는 정치와 기독교 양면에서 4세기의 중심지였다. 4세기 후반 밀라노에는 성 나자로, 성 심플리치아노, 성 조반니 인 콘차, 성 테클라, 성 라우렌시오의 다섯 채의 교회가 세워졌다.

  •  성 라우렌시오(St. Lorenzo). 밀라노(Milano), 이탈리아. 370년경 - 초대교회의 중앙집중형 교회를 대표하는 건물로, 4세기 밀라노의 자유로운 기독교 기풍을 반영한다.
  •  성 라우렌시오(St. Lorenzo). 밀라노(Milano)의 전경 <출처 : Warburg at hu.wikipedia>


이들 교회는 다양한 평면구성과 튼실한 시공 상태를 보여주면서 당시 밀라노의 기독교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며 활성화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바실리카 교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중앙 집중 형 평면을 실험했으며 바실리카 교회를 사용할 경우에도 여러 방향으로 변형, 응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는 성 라우렌시오이다. 17~18세기 때 바로크 양식으로 증축되었지만 초기 기독교 건축의 기본 구성이 잘 남아있다. 지름 33여 미터의 사엽형(四葉形)을 기본 윤곽으로 삼아 중심공간과 복도를 분리시킨 반지형 공간으로 구성된다. 성 코스탄차를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완전한 원이 아닌 사엽형을 사용하고 네 귀퉁이를 부분 사각형으로 돌출시키는 등 변형을 가했다. 사엽형 중심공간은 높이가 41여 미터에 이르러 지름에 비해 우물 속처럼 깊은 수직공간을 이룬다.


5세기와 고전 부활

4세기 말에 로마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4세기 때 침체가 정치적 침체였는데 기독교가 융성하면서 이것을 대체하며 활기를 되찾아 온 것이다. 로마는 기독교 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4세기 말에 전조 현상이 나타나 5세기 때 기독교 도시로의 변신이 일단락된다. 5세기 동안 로마 시내에는 초기기독교 교회들이 여러 채 지어지면서 콘스탄티누스 교회와 합해져 초대교회의 골격을 완성한다. 기독교 양식 내부에 국한시켜보면 바실리카 교회의 표준유형이 부활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에 첫 번째 기독교 전파가 일어나면서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지만 5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보수화된다. 기독교가 자리 잡은데 따른 결과였다.

5세기 고전 부활에서는 트랜셉트.(transept, 십자형 교회당에서 본당과 부속 건물을 연결하여 주는 공간)조차 없는 3랑식 표준 바실리카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380년경에 시작해서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을 이끈 것은 교황들이었다. 이 기간은 로마 교회건축사에서 17~18세기 바로크 시대 다음 가는 전성기였다. 성 밖의 성 바오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라테란 세례당, 성 스테파노 로톤도 등의 주요 교회 네 채가 지어졌고 그 이외에도 성 클레멘테, 성 사비나, 성 시스토 베키오 등 십 여 채의 교구교회들이 지어졌다.

성 밖의 성 바오로(St. Paul's fuori le mura). 로마. 380년 - 구 성 베드로와 함께 로마의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며 5세기 로마 기독교건축의 보수주의의 문을 연 건물이다.


5세기 로마의 기독교 건축
시리키우스는 384년 교황 취임과 동시에 성 밖의 성 바오로 증축 공사를 시작해서 400년경 완공했다. 콘스탄티누스 때 첫 번째 교회를 지었으나 사도 바오로의 권위에 크게 미흡하다고 판단해서 그에 걸맞게 증축한 것이다. 구 성 베드로와 짝을 이룰 목적에서 이를 모델로 삼아 5랑식 바실리카 교회로 지었다. 안마당과 전실을 뒀으며 트랜셉트와 앱스가 합해져 성소를 형성했다. 트랜셉트는 두 겹으로 두께는 두꺼웠으나 깊이가 아주 얕아서 돌출된 정도는 약했다. 두 트랜셉트 사이는 한 번 구획 되었다. 아래쪽 트랜셉트의 크로싱 부분 지하에는 바오로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 제단을 배치했다. 전체 크기는 97미터 x 72미터였다. 이 교회는 구 성 베드로와 짝을 이루며 로마의 초기기독교 건축을 대표했다.

성 사비나(St. Sabina). 로마. 422~432년 - 5세기 로마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건물로 트랜셉트 없는 일랑식 바실리카 원형을 부활시킨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성 사비나는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 때인 422~430년에 지어진 것인데 5세기 원리주의를 잘 보여준다. 앞의 두 교회보다 훨씬 정리된 바실리카 교회 원형을 준수했다. 안마당, 전실, 트랜셉트 등이 모두 사라진 3랑식 육면체 공간만으로 이루어졌다. 성소를 별도의 영역으로 처리하던 구획도 사라졌는데 이는 기독교가 교조화, 세력화되기 이전의 초기 정신, 즉 역사적 예수가 던진 기본정신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을 뜻한다. 네이브의 폭은 좁아졌고 길이는 길어졌으며 높이는 높아졌다. 오더의 간격도 촘촘해지면서 폐쇄적 짜임새가 느껴진다. 그만큼 선형구성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제식을 중시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제단을 향한 종교적 집중을 높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직자 영역이 넓어지면서 기독교가 권력화된 현상을 반영하던 데에서 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로마. 432년 <출처 : Kit36a at hu.wikipedia>


식스투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압력을 이겨내고 서방 가톨릭을 지킨 장본인인데 교회 축조는 이런 노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와 라테란 세례당을 확장했고 루치나의 성 라우렌시오를 새로 지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는 고전 부활의 절정을 보여준다. 시작부터 로마 시대 바실리카를 개조했기 때문에 바실리카 교회의 기본 구성이 잘 지켜졌다. 이 위에 규모를 확장하고 화려한 장식을 더하는 방식으로 증축했다. 안마당과 트랜셉트가 없는 단순 3랑식이다. 동쪽 끝부분은 별도의 영역으로 구획해서 성소를 형성했다.


5~6세기 라벤나 - 보수주의의 마지막 꽃

라벤나는 5세기 보수주의가 마지막으로 꽃핀 곳이었다. 라벤나는 지금도 질과 양 모두에서 로마 다음으로 초기기독교 건축의 건물이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이다. 5세기 중반까지는 밀라노, 에게 해, 로마 등 여러 지역에서 영향을 받아 비교적 자유로운 기독교 건물이 지어졌다. 성 크로체, 갈라 플라치디아의 원형무덤, 동방 정교회세례당, 성 조반니 에반젤리스트 등이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원형무덤과 동방정교회 세례당은 중앙 집중 형 건물로 주로 동방의 영향을 받았으며 여기에 4세기 밀라노에서 있었던 실험의 영향이 더해졌다.

동방 정교회 세례당(Orthodox Baptistery). 라벤나(Ravenna), 이탈리아. 400~450년 - 5세기 라벤나는 아직 4세기 밀라노의 영향아래 중앙집중형 교회가 유행하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유지된다.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S. Apollinare Nuovo). 라벤나(Ravenna), 이탈리아. 490년 - 6세기 라벤나는 로마의 영향 아래 보수주의로 회귀하는데 성 사비나를 받아들여 바실리카 원형이 다시 등장했다.


5세기 중반 이후에는 로마의 보수주의가 밀려들어 바실리카 원형이 부활했다. 성 스피리토,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라벤나의 초대 주교인 성 아폴리나레에게 봉헌된 두 채의 교회는 쌍둥이로 보일 정도로 닮았는데 모두 성 사비나의 평면이 전파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트랜셉트 없는 3랑식 육면체로 구성되며 동쪽 끝에 대향 앱스를 뒀고 네이브와 아일은 아케이드로 구획했다. 여기에 동방의 영향이 함께 섞여 나타났다.

라틴웨스트 기독교 - 기독교의 확장

콘스탄티누스가 완성한 교회건축은 그의 사후에 기독교가 전도되는 경로를 따라 빠르게 전파되어 갔다. 종교가 전파될 때에는 그 제식에 적합한 건축양식도 함께 가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미 기울기 시작하던 로마를 콘스탄티누스가 잠시 부흥시키는 듯 했으나 이미 그는 기독교로 너무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의 사후에 로마는 본격적인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기독교였다. 로마와 기독교의 관계는 묘한 양면성이 있었다. 로마에게 탄압을 받으면서도 기독교는 로마 사회에 파고들어 깊이 뿌리 박았으며 결국은 로마가 기울어가자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부터 서유럽이 본격적인 침체기에 들어가는 7세기까지의 초기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누스 교회가 여러 지역으로 전파, 수출되는 전파기(혹은 확장기)에 해당된다. 그 방향은 에게해 연안, 동방내륙, 라틴 웨스트의 세 갈래로 정리해볼 수 있다. 에게해 연안의 초기 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가 형성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며 지역의 전통건축과 합해져서 비잔틴 건축으로 이어진다. 동방내륙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 고원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지역을 이르는데 이 지역의 초기기독교 건축은 콘스탄티누스 때 홀리 랜드에 지어졌던 교회건축을 바탕으로 지역 전통과 에게해 연안의 기독교 건축을 합한 특징을 보였다.


4세기 밀라노의 기독교 건축

라틴 웨스트는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동쪽의 아드리아 해안과 달마티아, 서쪽의 남프랑스와 스페인, 남쪽의 북아프리카 연안 등을 이른다. 이탈리아 반도가 단연 중심지였다. 로마를 중심으로 밀라노와 라벤나가 특히 중요했다. 4세기는 밀라노가 중심지였다. 콘스탄티누스 사후 로마가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들자 그 자리를 밀라노가 대신했다. 353년 이후 황제들은 밀라노에 자주 머물렀고 374년에는 성 암브로시우스가 밀라노의 주교로 임명되는 등 밀라노는 정치와 기독교 양면에서 4세기의 중심지였다. 4세기 후반 밀라노에는 성 나자로, 성 심플리치아노, 성 조반니 인 콘차, 성 테클라, 성 라우렌시오의 다섯 채의 교회가 세워졌다.

  •  성 라우렌시오(St. Lorenzo). 밀라노(Milano), 이탈리아. 370년경 - 초대교회의 중앙집중형 교회를 대표하는 건물로, 4세기 밀라노의 자유로운 기독교 기풍을 반영한다.
  •  성 라우렌시오(St. Lorenzo). 밀라노(Milano)의 전경 <출처 : Warburg at hu.wikipedia>


이들 교회는 다양한 평면구성과 튼실한 시공 상태를 보여주면서 당시 밀라노의 기독교가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며 활성화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바실리카 교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중앙 집중 형 평면을 실험했으며 바실리카 교회를 사용할 경우에도 여러 방향으로 변형, 응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교회는 성 라우렌시오이다. 17~18세기 때 바로크 양식으로 증축되었지만 초기 기독교 건축의 기본 구성이 잘 남아있다. 지름 33여 미터의 사엽형(四葉形)을 기본 윤곽으로 삼아 중심공간과 복도를 분리시킨 반지형 공간으로 구성된다. 성 코스탄차를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완전한 원이 아닌 사엽형을 사용하고 네 귀퉁이를 부분 사각형으로 돌출시키는 등 변형을 가했다. 사엽형 중심공간은 높이가 41여 미터에 이르러 지름에 비해 우물 속처럼 깊은 수직공간을 이룬다.


5세기와 고전 부활

4세기 말에 로마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4세기 때 침체가 정치적 침체였는데 기독교가 융성하면서 이것을 대체하며 활기를 되찾아 온 것이다. 로마는 기독교 도시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4세기 말에 전조 현상이 나타나 5세기 때 기독교 도시로의 변신이 일단락된다. 5세기 동안 로마 시내에는 초기기독교 교회들이 여러 채 지어지면서 콘스탄티누스 교회와 합해져 초대교회의 골격을 완성한다. 기독교 양식 내부에 국한시켜보면 바실리카 교회의 표준유형이 부활했다. 콘스탄티누스 사후에 첫 번째 기독교 전파가 일어나면서 다양한 실험이 시도되지만 5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는 보수화된다. 기독교가 자리 잡은데 따른 결과였다.

5세기 고전 부활에서는 트랜셉트.(transept, 십자형 교회당에서 본당과 부속 건물을 연결하여 주는 공간)조차 없는 3랑식 표준 바실리카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380년경에 시작해서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을 이끈 것은 교황들이었다. 이 기간은 로마 교회건축사에서 17~18세기 바로크 시대 다음 가는 전성기였다. 성 밖의 성 바오로, 산타 마리아 마조레, 라테란 세례당, 성 스테파노 로톤도 등의 주요 교회 네 채가 지어졌고 그 이외에도 성 클레멘테, 성 사비나, 성 시스토 베키오 등 십 여 채의 교구교회들이 지어졌다.

성 밖의 성 바오로(St. Paul's fuori le mura). 로마. 380년 - 구 성 베드로와 함께 로마의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며 5세기 로마 기독교건축의 보수주의의 문을 연 건물이다.


5세기 로마의 기독교 건축
시리키우스는 384년 교황 취임과 동시에 성 밖의 성 바오로 증축 공사를 시작해서 400년경 완공했다. 콘스탄티누스 때 첫 번째 교회를 지었으나 사도 바오로의 권위에 크게 미흡하다고 판단해서 그에 걸맞게 증축한 것이다. 구 성 베드로와 짝을 이룰 목적에서 이를 모델로 삼아 5랑식 바실리카 교회로 지었다. 안마당과 전실을 뒀으며 트랜셉트와 앱스가 합해져 성소를 형성했다. 트랜셉트는 두 겹으로 두께는 두꺼웠으나 깊이가 아주 얕아서 돌출된 정도는 약했다. 두 트랜셉트 사이는 한 번 구획 되었다. 아래쪽 트랜셉트의 크로싱 부분 지하에는 바오로의 무덤이 있고 그 위에 제단을 배치했다. 전체 크기는 97미터 x 72미터였다. 이 교회는 구 성 베드로와 짝을 이루며 로마의 초기기독교 건축을 대표했다.

성 사비나(St. Sabina). 로마. 422~432년 - 5세기 로마의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건물로 트랜셉트 없는 일랑식 바실리카 원형을 부활시킨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성 사비나는 교황 셀레스티누스 1세 때인 422~430년에 지어진 것인데 5세기 원리주의를 잘 보여준다. 앞의 두 교회보다 훨씬 정리된 바실리카 교회 원형을 준수했다. 안마당, 전실, 트랜셉트 등이 모두 사라진 3랑식 육면체 공간만으로 이루어졌다. 성소를 별도의 영역으로 처리하던 구획도 사라졌는데 이는 기독교가 교조화, 세력화되기 이전의 초기 정신, 즉 역사적 예수가 던진 기본정신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을 뜻한다. 네이브의 폭은 좁아졌고 길이는 길어졌으며 높이는 높아졌다. 오더의 간격도 촘촘해지면서 폐쇄적 짜임새가 느껴진다. 그만큼 선형구성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제식을 중시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제단을 향한 종교적 집중을 높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직자 영역이 넓어지면서 기독교가 권력화된 현상을 반영하던 데에서 원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 로마. 432년 <출처 : Kit36a at hu.wikipedia>


식스투스 3세는 동로마 황제의 압력을 이겨내고 서방 가톨릭을 지킨 장본인인데 교회 축조는 이런 노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와 라테란 세례당을 확장했고 루치나의 성 라우렌시오를 새로 지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는 고전 부활의 절정을 보여준다. 시작부터 로마 시대 바실리카를 개조했기 때문에 바실리카 교회의 기본 구성이 잘 지켜졌다. 이 위에 규모를 확장하고 화려한 장식을 더하는 방식으로 증축했다. 안마당과 트랜셉트가 없는 단순 3랑식이다. 동쪽 끝부분은 별도의 영역으로 구획해서 성소를 형성했다.


5~6세기 라벤나 - 보수주의의 마지막 꽃

라벤나는 5세기 보수주의가 마지막으로 꽃핀 곳이었다. 라벤나는 지금도 질과 양 모두에서 로마 다음으로 초기기독교 건축의 건물이 제일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이다. 5세기 중반까지는 밀라노, 에게 해, 로마 등 여러 지역에서 영향을 받아 비교적 자유로운 기독교 건물이 지어졌다. 성 크로체, 갈라 플라치디아의 원형무덤, 동방 정교회세례당, 성 조반니 에반젤리스트 등이다. 갈라 플라치디아의 원형무덤과 동방정교회 세례당은 중앙 집중 형 건물로 주로 동방의 영향을 받았으며 여기에 4세기 밀라노에서 있었던 실험의 영향이 더해졌다.

동방 정교회 세례당(Orthodox Baptistery). 라벤나(Ravenna), 이탈리아. 400~450년 - 5세기 라벤나는 아직 4세기 밀라노의 영향아래 중앙집중형 교회가 유행하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유지된다.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S. Apollinare Nuovo). 라벤나(Ravenna), 이탈리아. 490년 - 6세기 라벤나는 로마의 영향 아래 보수주의로 회귀하는데 성 사비나를 받아들여 바실리카 원형이 다시 등장했다.


5세기 중반 이후에는 로마의 보수주의가 밀려들어 바실리카 원형이 부활했다. 성 스피리토,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 아폴리나레 인 클라세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라벤나의 초대 주교인 성 아폴리나레에게 봉헌된 두 채의 교회는 쌍둥이로 보일 정도로 닮았는데 모두 성 사비나의 평면이 전파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트랜셉트 없는 3랑식 육면체로 구성되며 동쪽 끝에 대향 앱스를 뒀고 네이브와 아일은 아케이드로 구획했다. 여기에 동방의 영향이 함께 섞여 나타났다.